2026 언바운드 기획 

유연하게 단단하게

김아야, 서은정, 정선경

1월 14일(수) - 1월 25일(일) 



  <유연하고 단단하게>는 서로 다른 재료와 조형 언어를 사용하는 김아야, 서은정, 정선경 작가가 삶을 통과하며 형성한 자신만의 삶의 태도와 구조를 다루는 전시이다. 본 전시는 개인의 경험을 서사적으로 나열하기보다, 그 경험들이 축적되고 변형되며 만들어낸 상태와 감각의 구조에 주목한다. 섬유, 흙, 금속이라는 물성은 단단함과 유연함이라는 상반된 성질을 동시에 지닌다. 세 작가는 이러한 재료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감정을 감싸고 재구성하는 과정, 예측할 수 없는 변화의 순간,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각화한다. 작품 속 형상들은 고정된 결과라기보다, 선택과 반복, 그리고 시간의 압축 속에서 형성된 과정의 흔적에 가깝다.


  김아야는 감정과 기억이 축적되고 소거되는 과정이 개인의 정체성에 어떠한 구조를 남기는지 탐구한다. 작가의 작업은 특정 사건의 서술보다, 경험 이후에도 지속되는 감정의 잔여와 그 물리적 감각에 주목한다. 삶의 과정에서 형성된 상처와 불안, 회복의 흔적은 작가에게 자아를 구성하는 중요한 재료로 작동한다. 

  섬유와 자수는 이러한 감정의 구조를 시각화하는 주요한 매체이다. 반복되는 바느질의 행위는 감정을 봉합하는 동시에 드러내는 이중적인 과정으로 기능하며, 실과 펠트는 유연하면서도 쉽게 해체되지 않는 기억의 성질을 닮아 있다. 작가는 이 친밀한 재료를 통해 언어로 환원되기 어려운 감정의 밀도와 시간을 층위적으로 쌓아 올린다. 특히 최근 작업에서 중심적으로 다루는 ‘커버업 타투’는 상처를 감추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흉터 위에 새로운 서사를 덧입히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이는 개인의 취약함을 삭제하는 행위가 아닐, 그것을 하나의 형태로 재구성하며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선택에 가깝다. 김아야의 작업에서 상처는 은폐의 대상이 아닐, 다시 쓰이며 다른 의미를 획득하는 지점이다.


  서은정은 구체적인 언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순간의 감각과, 그때 발생하는 정신의 상태에 주목한다. 작가는 외부 자극에 대한 찰나의 반응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내면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이를 도자를 기반으로 한 조형적 언어로 전환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형상들은 완결된 조형이라기보다, 무언가를 간신히 지탱하며 존재하는 어떠한 상태에 가깝다. 흙은 쌓이고 눌리며 몸체를 형성하지만, 동시에 쉽게 갈라지고 무너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작가는 이러한 모순적인 물성을 제어하기보다 그대로 수용하며, 반복적인 손의 개입과 물리적 압력을 통해 형태를 만들어간다. 작업 과정에서 고온에서 흐르고 뭉친 유약은 표면을 가리거나 변형시키며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로 인해 작품은 형식과 의미가 고정되지 않은 채, 긴장과 불안정, 그리고 미묘한 유머가 공존하는 상태로 남는다. 서은정의 작업은 안정과 붕괴 사이의 균형 위에서, 존재가 유지되는 순간의 감각을 포착한다.


  정선경은 꿈을 향해 나아가는 개인의 움직임과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삶의 경로를 기하학적 구조로 풀어낸다. 작품에 등장하는 구와 원기둥은 구체적인 인물을 묘사하기보다, 희망과 방향성,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움직임을 상징하는 조형적 요소로 작동한다.

  금속판을 투각하는 방식은 단순한 형상 제작을 넘어, 지나온 경로와 선택의 흔적을 남기는 과정이다. 원기둥이 통과한 자리에는 선과 여백이 발생하고, 그 축적은 개개인의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암시한다. 작가는 이 과정을 통해 삶이 하나의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이동과 반복 속에서 형성된 어떠한 구조 체계임을 드러낸다. 정선경 작가의 작업은 전통 금속공예 기법을 기반으로 하되, 그 시각적 전형성에 머무르지 않고 장신구, 오브제, 평면 작업으로 형식을 확장하는 실험을 지속한다. 그의 작업에서 금속은 단단한 재료인 동시에, 다양한 해석과 서사를 수용하는 유연한 매체로 기능한다.


  본 전시에서 유연함은 불안정함이나 취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에 반응하고 형태를 바꾸려는 능력으로 작동한다. 동시에 단단함은 완결이나 고정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유지되는 구조와 태도를 가리킨다. 세 작가의 작업은 이 두 성질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함께 작동하며 삶을 지탱하는 방식을 보여준다.